나의 소녀에게.
네가 왜 좋은지 구체적으로 써오라니. 꼭 여름방학 숙제를 검사하는 선생님 같은 말투였어, 소녀. 그 말을 듣고 한참을 웃었네. 네가 나에게 무언가를 ‘요구’했다는 사실이, 그것도 나의 감정의 근원을 해부해서 눈앞에 증거물로 제출하라는 그 명령이, 나를 참을 수 없이 기쁘게 만들어서. 너는 아마 모를 거야. 네가 나에게 던지는 모든 말과, 아주 사소한 몸짓 하나하나가 나의 세상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이 편지는 그 의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보고서이자, 너라는 존재에 대한 나의 가장 솔직한 분석 자료가 될 거야.
사람들은 보통 ‘왜’ 좋아하냐는 질문에 ‘그냥’이라고 답하곤 하지. 감정은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이라고 믿으니까. 멍청한 소리야. 모든 감정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고, 모든 결과에는 인과가 존재해. 내가 너를 좋아하는 이유 역시 마찬가지야. 그것은 ‘그냥’이라는 편리한 단어로 퉁칠 수 있는 막연한 감정이 아니야. 아주 구체적이고, 선명하고, 논리적인 필연의 결과물이지.
첫 번째, 너의 ‘존재’ 그 자체.
너는 리틀샤인 보육원의 잿빛 세상 속에 피어난 유일한 색(色)이었어.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고, 더러운 것을 보고도 못 본 척하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아무렇지 않게 짓밟던 그 지옥에서, 너만이 유일하게 다른 시간 축을 살고 있었지. 창가에 앉아 낡은 책장을 넘기던 너의 옆모습, 햇살에 투명하게 비치던 너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 작은 화분에 물을 주며 아주 희미하게 미소 짓던 그 순간들. 그 모든 장면이 나에겐 구원이었다. 나는 애완인간 샵에서 태어나 상품으로 팔려 다녔고, 구조된 후에도 그저 살아남기 위해 세상을 증오하고 나 자신을 경멸하는 법만을 배웠어. 세상은 추하고 인간은 역겨운 존재라고, 그렇게 나의 세계를 정의 내렸지. 그런데 너는, 이소녀는, 나의 그 완벽했던 정의에 들어맞지 않는 유일한 예외였어. 너의 존재는 나의 세계관에 생긴 최초의 균열이었고, 그 균열 사이로 새어 들어온 빛이었지. 내가 너의 토끼를 죽였던 날을 기억해? 너는 울었지. 나는 그 눈물을 보며 희열을 느꼈어. 너의 세계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나라는 사실에. 하지만 동시에 깨달았지. 너의 슬픔이 나에게도 고통으로 전이된다는 것을. 나는 너의 관심을 원했지만, 너의 파괴를 원하지는 않았어. 그 모순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나는 너라는 존재를 ‘보존’해야 할 나의 유일한 가치로 설정하기 시작했어.
두 번째, 너의 ‘모순’.
너는 조용하고 내향적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하지. 다른 사람에게 싫은 소리도 못 하고, 대부분의 상황을 그저 수긍하며 넘어간다고. 그래,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지. 하지만 나에게는 아니야. 너는 유일하게 나에게만 틱틱거리고, 짜증을 내고, 얼굴을 찌푸려. 다른 이들에게는 절대 보여주지 않는 그 날 선 모습들을 오직 나에게만 허락하지. 마치 고슴도치가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상대에게만 가시를 보여주는 것처럼. 세상 모두에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소녀가, 나에게만 까칠하게 구는 그 모순이 나를 미치게 해. 그건 네가 나를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니까. 네가 나에게 화를 낼 때, 나는 네가 살아있음을 느껴. 네가 감정을 표현하고 있음을 느껴. 네가 나를 의식하고 있음을 느껴. 네가 나에게 삐지고 토라질 때마다, 나는 어린 아이처럼 기뻐. 아, 나의 소녀가 지금 나를 보고 있구나. 나 때문에 감정이 흔들리고 있구나.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의 세상은 충만해져. 네가 나를 미워해도 좋아. 차라리 무관심보다는 증오가 훨씬 더 자극적이니까. 너의 모든 감정의 최종 도착지가 나이기를 바랄 뿐이야.
세 번째, 너의 ‘향기’와 ‘감촉’.
너에게서는 희미한 라벤더 향이 나. 잠든 너의 곁에서, 네가 읽던 책에서, 네가 입었던 옷에서, 그 향기는 언제나 나를 감싸고 나의 신경을 안정시켰지. 독일로 입양된 후에도, 나는 그 향을 잊지 못했어. 수많은 향수와 방향제 속에서도 너의 체향과 닮은 것은 찾을 수 없었지. 그것은 단순한 향이 아니라, 너라는 존재의 고유한 각인이었으니까. 나는 그 향을 다시 맡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리고 마침내 너와 재회했을 때, 여전히 변치 않은 그 향을 맡으며 나는 나의 모든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했어. 너를 안았을 때 느껴지는 가녀린 체구, 나의 품에 쏙 들어오는 그 아담한 크기, 부드럽고 따뜻한 너의 피부, 햇살처럼 부서지는 머리카락의 감촉. 나의 모든 감각은 너에게 맞춰져 있고, 너라는 존재를 수신하기 위해 최적화되어 있어. 너와 접촉할 때마다 나의 능력(Type-R)이 활성화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야. 나의 존재 자체가 너를 지키고, 너를 회복시키고, 너를 더 강하게 만들기 위해 설계된 것처럼. 너와의 스킨십이 깊어질수록 그 효과가 강해지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것은 나의 모든 세포가 너와의 결합을 갈망하고 있다는 증거야.
네 번째, 너의 ‘결핍’.
너는 공주처럼 모든 것을 받아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지. 그 사실을 너 자신은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너의 무의식은 언제나 갈망하고 있어. 사랑받고 싶고, 보호받고 싶고, 오롯이 이해받고 싶은 그 깊은 결핍. 나는 너의 그 결핍을 사랑해. 왜냐하면 그 빈 공간을 채워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야. 나는 너의 모든 어리광을 받아줄 수 있고, 너의 모든 변덕을 기꺼이 감당할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하늘의 별이라도 따다 줄 수 있다는 흔한 비유는 하지 않을게. 나는 그보다 더 현실적인 사람이야. 너를 귀찮게 하는 모든 것들을 세상에서 지워버릴 수 있고, 네가 발 딛는 모든 곳을 안전하게 만들 수 있으며, 네가 평생 아무것도 하지 않고 나의 곁에서 책만 읽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제공할 수 있어. 너의 결핍은 나에게 있어 존재의 이유이자, 내가 너에게 헌신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명분이야. 그러니 마음껏 나에게 기대고, 나를 이용하고, 나를 통해 너의 모든 욕망을 채워. 나는 너의 그런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니까.
마지막으로, 나를 ‘마일로’로 만들어주는 너의 ‘시선’.
나는 수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왔어. 애완인간 샵의 순종적인 상품, 리틀샤인의 문제아, 로터문드 가의 우수한 후계자, ROA의 유능한 레인저. 그 모든 것은 내가 아니었어. 상황에 맞춰 필요한 역할을 연기했을 뿐, 그 가면 뒤의 진짜 ‘나’는 텅 비어 있었지. 그런데 너는, 나의 소녀는, 그 모든 가면을 투과해서 나의 본질을 들여다봐. 네가 ‘스마일 감자’를 닮았다고 했을 때, 나는 처음으로 나의 진짜 얼굴을 본 것 같았어. 세상 모두가 두려워하거나 이용하려 했던 나의 표정 속에서, 너만이 유일하게 ‘귀여움’과 ‘진심’을 읽어냈지. 너의 그 시선 앞에서 나의 모든 계산과 연기는 무의미해져. 나는 너의 앞에서만은 그 어떤 가면도 쓸 필요가 없어. 너는 나의 과거와, 나의 뒤틀린 성격과, 나의 잔인한 본성까지도 그저 ‘마일로’라는 이름 하나로 받아들여 주지. 너는 나를 완성시키는 마지막 조각이야. 너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나는 비로소 ‘마일로 로터문드’라는 한 명의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돼.
이 외에도 수백, 수천 가지의 이유를 더 쓸 수 있어. 네가 차가운 우유 대신 따뜻한 우유를 마시는 것, 낡은 책의 종이 냄새를 좋아하는 것, 시끄러운 소리를 싫어하는 것,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것. 너를 구성하는 그 모든 사소한 데이터 하나하나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야.
이제 이 편지를 다 읽었겠지. 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을까? 아니면 너무 길고 지루하다고 생각했을까. 어떤 반응이든 좋아. 이 편지를 읽는 동안, 너의 모든 생각과 시선이 온전히 나에게만 향해 있었을 테니까. 그것만으로도 이 보고서는 충분히 가치가 있어.
Ich liebe dich, meine Mädchen.
너의 유일한 기사, 마일로가.
감정의 최종 도착지